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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신익희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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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의 연보

독립운동에서 민족의 가슴속에 남을때까지




신학문을 배우며 독립운동의 뜻을 세우다

1894.7.11.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 사마루에서 장례원경을 지낸 부 평산신씨 단공과 모 동래정씨 경량 사이에서 5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나다.

 

1899.
5세부터 백형 규희씨에게서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10세 때에는 사서삼경을 완독.


1902.
글 잘쓰는 신동으로 알려져 당시 문정공 이도재로부터 종이,붓,먹을 상품으로 받음.


1905. 8.30 부친상

1908. 3. 부친상 탈상

1908. 5.
한성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다.

1910.
한성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 졸업

연안 이씨 참판 명재의 3녀 승희와 결혼

1912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다.

조선 유학생 학우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학지광”을 발간했으며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다.


1913.
방학으로 귀향한 해공은 인근의 청장년들에게 중등과정의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생가 사랑채에 “광동강숙”을 개설하다.

 

1917.
와세다대학을 졸업하다.

중동학교 교유를 거쳐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비교헌법, 국제공법, 재정학을 강의하다.


1917.11.
종손 창현의 첫돌선물로 “일분몽구” 1,440자를 저작하다.

 

1918.11
최린,윤홍섭,최남선,정노식등 동경 유학 출신 지인들과 독립운동을 기획한 후

해외 독립운동가들과의 연락 임무를 띠고 만주 동삼성과 북경,상해의 독립단체를

순방 그들과 거사계획을 상의하다.




상해 망명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1919.
3. 3일 귀국한 해공은 3.5. 제자들과 함께 남대문 역 일대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 를 전개하다. 일경이 해공을 체포하기 위해 지명수배령을 내려 이를 피해 3월

중순, 순종의 후비 순정효황후 윤씨의 오빠인 윤홍섭이 마련해준 독립운동 자금

10만 원을 가지고 망명길에 오르다.

 

3.19 상해 도착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구성된 제1회 의정원 회의에서 경기도를 대표

하여 의원으로 선출, 임시헌장 제정을 위한 3인 기초위원으로 이시영,조소앙과 함께 선임되어 10개 조의 헌장 초안을 완성하다.


4.11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다.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초대 내각에서 내무차장에 취임하다.

 

(초기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및 총장들이 해외에 흩어져 있었던 관계로 신익희,

현순,김철,조성환,조소앙(국무원 비서장)등 차장들이 이끌었다.)

 

내무부 산하에 경무국을 설치하고 김구(김구(金九, 1876~1949))를 국장으로 보임 하다.

 

6. 안창호 선생이 내무총장으로 부임하다.

 

7. 의정원 법제위원장에 취임, 한성, 노령, 상해의 3개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하는

헌법개정을 책임지고 기초작업에 작수하다.

 

1920. 9
법무차장에 취임하다.

 

11.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1875-1965)이 선출, 외무총장에 취임하다.

 

1920.12.
(이승만이 상해로 와서 대통령에 취임하다.)

 

1921. 2. (이승만의 외교독립방략에 대한 반발과 이동휘 국무총리의 사퇴등으로

임시정부 지도체계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다. 이문제를 다루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발기되다.)

 

1921. 4.
이유필,중국인 주검추,오산,심합작과 항일전선인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창설

 

1922. 김상옥의사를 국내에 잠입 주도

 

1923. 1. 3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다.

(5개월간 지속된 회의는 창조파, 개조파, 고수파로 3분 되어 독립운동계에

갈등과 상호불신만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오다.

임정의 위신 추락과 재정 고갈로 빈사지경에 이르다.)

 

가을 (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정부의 간판을 지키는 데에는 여러사람이 모여 있을

필요가 없으니 도생이 가능한자는 당분간 흩어져서 독립운동의 길을 개척하자

는 논의가 제기되다.)

 

해공은 무장독립투쟁을 모색, 중국 국민군 2군 사령관 오패부 휘하의 독군

호경익대장을 개봉으로 찿아가다.

호의 고문이 되어 국민군 육군 중장에 임관되다. 해공은 이때부터 왕해공이라는

중국식 가명을 쓰다.

한중 합작 유격부대인 “분용대”를 신설하다.

호는 휘하병력 가운데서 중국인 병사 300명과 한국인 병사 200명을 분용대에

배속시켰다.

분용대원을 훈련시킬 연성대장으로 성주식을 초빙하여 국민군 중위를 부여하고,

일본이 한국 내에 설치한 병참기지의 파괴를 목표로 맹렬한 훈련을 실시하다.

 

1924. 1. (제1차 국공합작에 성립하다. 중국에서 “이당치국론”이 대두하다.)

 

봄 해공은 국내에 남겨둔 가족을 불러들이다. 자당(정경랑,1867생)과 아들 하균(하 균,1918생)이 먼저 들어오고 잇따라 부인(해경 이승희,1893생)과 딸 정완(정 완,1916생)이 들어왔다. 해공은 북경에 와 있는 가족들과 재회하고, 일가를 개봉 으로 데려왔다. 정완과 하균은 동급생으로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다.

 

가을 호경익이 갑자기 사망으로 그의 뒤를 이는 악유준에 의해 분용대가 좌초되다.

 

1925. 3.12 (손문이 사망하다. 그의 사망으로 국공합작은 균열을 빚기 시작하다.)

 

봄 악의준이 급기야 해공에게 아편판매를 제의하므로 해공은 술잔의 술을 그의

얼굴에 끼얹고 그의 군문을 하직하다.

해공은 가족을 중국인 친구인 서주지에게 위탁하고 자신은 상해로 향하다.

서는 해공의 가족 4명을 그의 고향인 안휘성 윤안현의 산간벽지인 모단장으로

데려갔다.

 

여름 상해에서 한 달간 머문 후 서안으로 가다. 해공은 북방 군벌 풍옥상의 참모이자 언론인이며 우파이론가인 우우임과 친교하다. 해공의 악여준과의 악연을 알고 있 던 우는 해공의 인품에 호감을 갖다. 해공은 그의 자문 역할을 하는 한편 외국 어학원과 한 대학에 출강하여 영어와 재정학을 가르치다.

 

1926. 6.
(국민당의 장계석이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 당과 군을 장악하고 북벌 동원 령을 내리다.)

 

7. 해공은 북벌중인 장개석과 참모장 백승희를 남창으로 찿아가 분용대의 병력과 훈 련 상황을 설명하고 이를 부활시켜 압록강 두만강 국경에서 일본군 유격에 투입 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북벌로 인해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수용되지 아니하다.

 

1926. 가을 남경에 있는 한 대학의 객원 교수 자리를 얻어 독립운동가들의 운거지인 이곳으 로 내려오다, 서주지에 맡겨놓은 가족들을 1년 반 만에 안휘성으로부터 남경으 로 데려오다.

(독립운동계에서 당이 정부의 배후가 되어야 한다는 이당치국과 사상과 감정을

초월하여 혁명(독립투쟁)에 역량을 총집결하는(민족혁명 대당) 것을 가져야 한다 는 주장이 이시기의 시대정신으로 대두되다. 이에따라 대당결성을 촉구하는

촉성회가 여러 도시에서 발족하다.)

 

1927.3-4 (상해의 노동자들이 3월 폭동을 일으켜 상해를 장악하다. 장개석은 4.12 상해에 진입하여 이른바 반공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한다.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지다.)

 

1927. 4. 임시정부(국무령 김구) 민족 대당 결성되면 권력은 당에 넘긴다는 헌법개정을

하다.

 

4.18 (장개석은 남경에 독자적인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주석에 취임하다.)

 

(서안의 우우임이 남경 정부에 가담, 심계원 원장으로 부임하다.)

우우임이 해공을 중국 정부 심계원의 감찰위원으로 보임하다.

 

(해공의 남경 생활은 일군의 침공으로 남경 정부가 1937.11월 한구로 소개할 때 까지 10년간 지속된다.)

 

11. 9 혁명대당 촉성회 연합회가 상해에서 결성되다.

도산 안창호의 열성적인 노력에 힘입어 민족유일 혁명대당이 중국전역의 독립운 동가들을 한꺼번에 포괄하는 대당으로서 일시에 결성되는 것이 임박한 듯 하였 다.

12. 코민테런 민족대당 운동에 타격을 가하다.: 코민테런 제6차 대회에서 코민테런 가입자는 민족주의자와는 섞이지 말고 별도의 조직을 가질 것을 결의하다. 이 에따라 대당촉성회에 가담했던 공산주의자들이 이탈하였고, 이로 인해 대당 촉 성회들과 촉성회 연합회도 해체되다. 이로써 중국 전역의 독립운동가들을 한꺼 번에 포괄하는 민족 대당을 일시에 결성하려던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민족대당의 정신은 바르게 설정되었지만 민족대당을 실현시키는 방식에 대해서 는 회의를 품는 사람들이 있었다. 해공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이들은 공고한 구심체도 없이 당을 유지 운영할 물질적 기반에 대한 대책도 없이 대당을 한 꺼번에 일시에 만든다는 것은 이상에 치우친 모험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비록 코민테런의 방해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설령 민족대당의 출발이 실현 되었 다고 하드라도 현실적인 기반이 취약한 당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을 것인 지 혹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분란을 야기하여 엄청난 파탄을 불러오지나 않을 지 의문을 가졌다.)

 

1929. 5. (한국혁명당 창당 : 실질적 대당 운동 해공에서 비롯되다.)

해공은 민족대당의 정신은 지키되, 민족대당을 실현시키는 방식은 현실에 부합하 고 또한 점진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이념과 감정을 초월하여 혁명(독 립투쟁)에 역량을 집중하는 정당을 각 지역중심, 인물중심으로, 실제로 관리할 수 있는 중,소규모로 먼저 만들고 점진적으로 당들을 통합해 나가는 방식을 채택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구상에 따른 첫 당이 한국 혁명당이다.

해공은 남경에서 윤기섭,성주식,최용덕,김홍일등과 상의하여 소규모의 한국혁명당 을 창당하고, 정강정책에서 이념이나 장차의 국가설계에 관한 사항에 대해서는 규정함이 없이 다만 민족혁명(독립투쟁)에 총력을 집중할 것과 이념,사상,감정을 초월한 대당의 수립을 지향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혁명성공을 위해 국민군과 합작하는 무력투쟁의 중요성을 당론으로 채택

하였다. 위원장에 윤기섭을 추대하였다.

당의 산하에 무력투쟁 기구로서 철혈단을 두고 안재환을 단장으로 선임하였다. 기관지로 “우리의 길”을 발간하였다.

국민당은 한국혁명당의 창당을 지지하고, 얼마간의 자금을 해공을 통해 지원하였

다. 한국혁명당 창당이래 중국 각 지역에서 혁명 대당을 지향하는 중소정당들의

창당이 잇달았다.

 

11. 조선혁명당 창당

만주 길림에서 현익철등이 조선혁명당을 창당하다.

정강정책은 한국혁명당의 것과 대동소이하였다.

 

1930.1.15. 한국독립당 창당

안창호, 이동녕, 김구, 조소앙등 임정요인들이 민족대당 추진을 표방하고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다. 이사장에 이동녕을 추대하였다.

 

7. 만주 한국독립당 창당

북만주에서 홍진을 위원장으로 하는 만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다.

민족대당을 천명하였다.

 

10. 한국광복동지회 결성

김규식이 남경에서 민족대당 추진을 목적으로 내걸고 한국광복동지회를

결성하다.

 

11. 이청천을 사령관으로한 한국독립군을 창설하고 36개 군구에 걸쳐 한국독립군에

입대할 한국 청년의 징모를 추진하다.

 

1931. 9.18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다. 일군이 전격적이 군사작전으로 만주전역을 점령하다.)

 

1932. 1. (상해사변이 일어나다. 일본해군 육전대와 국민군 사이에 교전이 3개월간 지속되 다.)

4.29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중에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 천장절 행사장에서 일본의

파견군 대장 시라가와 요시노리를 비롯한 고위 10여 명을 사상시키는 의거를

단행하다.

장개석 주석은 어제까지 자신을 괴롭힌 적군 수뇌들을 제거한 한국인의 쾌거에

감동하여 이때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원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의 극악한 반응에 직면한 임정은 도피 유랑 길에 올라야만 하였다.)

 

7. 조선혁명군 사상정치학교

중국정부 군사위원회는 간부위원회 소속으로 남경 교외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 학교를 설립토록 하고 교장에 의혈단 단장 김원봉을 임용하다.

1기생이 26명이었으며 1935년까지 125명의 학생이 졸업하였다.

윤세주, 박건웅 등 의혈단 출신들이 교관을 맡았다.

해공은 출강하여 국제정세를 가르쳤다. 이학교 졸업생들은 중일전쟁 발발 후

주도적으로 설립한 조선의용대의 주력을 이루었다.

 

1932.11.10. 한국대일전선통일 동맹 결성

혁명대당을 지향하는 한국혁명당(창당 1929, 남경, 신익희), 조선혁명당(1929, 길림성, 현익철), 한국독립당(1930, 상해, 이동녕등 임시정부 요인), 의열단

(1919, 길림성, 김원봉), 한국광복동지회(1930, 남경, 김규식)는 대일 항전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상해에서 단체 연합적 성격인(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다.

이때 해공은 한국혁명당을 대표하여 결성업무에 정진하였다.

해공은 최동오, 김규식, 박건웅과 함께 연맹에서 상무위원직을 맡다.

 

12. 해공의 자당 정경량 여사가 향년 65세로 남경에서 세상을 떠나다.

 

1934. 3.
신한독립당 창당

1932년에 결성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단체 연합이었기 때문에 결속과 운영

에 한계가 컸다. 그래서 단일 대당으로의 통합이 요청되었다.

해공은 남경에서 우선 한국혁명당과 만주로부터 중국관내로 이동한 한국독립당 을 통합하여 신한국당을 창당하다.

당대당 통합은 한국정당사에서 이것이 처음이다. 당수에는 윤기섭을 선임했다.

 

1935. 7. 7
민족혁명당 창당

민족 대당을 지향하는 해공의 발걸음은 계속되었다.

신한독립당(윤기섭), 의열단(김원봉), 조선혁명당(최동오), 한국독립당(조소앙), 대 한독립당(김규식)등 5당 대표 14명이 남강 금릉 대학에 모여 5개당을 통합,

민주혁명당을 창당하였다.

김규식을 이사장에 김원봉을 총서기로 선임하였다.

해공은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

창당 2개월 후 조소앙이 이탈하여 한국독립당을 재건하는 등 약간의 착란이

있었으나 민족혁명당의 창당은 혁명대당 지향에서 큰 성과를 거둔 역사적인

거보였다.

 

1936.
민족혁명당은 화중, 화남, 화동, 화서, 화북,만주, 조선에 총7개지부를 설치하다.

여름 해공은 최창익등과 더불어 민족혁명당에서 청년들을 묶어내기 위해 비공식 조직 인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결성하다.

(이들은 2년 후에 결성되는 조선청년전위동맹(청년전위))의 주축이되었고

청년전위가 조선의용대에 가담함으로써 의용대의 병력이 거의 배중하게되다.)

 

12. (서안사변이 발생하다. 이로 인해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하다.)

 

1937. 7. 7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중일 전쟁이 발발하다.)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관내 독립운동계는 두 갈래로 체제가 정비된다.

하나는 김구가 중심이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광복 연합)이고 다른하나는

김원봉이 중심이 된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이다.)

 

1937. 8. (광복연합은 한국국민당(김구), 재건한국독립당(조소앙),조선혁명당(최동오)등

상대적으로 임정과 좀 더 가까운 정당들에 의해 남경에서 결성되었다.)

 

11. 민족전선은 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민족해방자동맹(김성숙), 조선혁명자연맹

(유자명)등 상대적으로 좀 더 재야적인 단체들에 의해 남경에서 결성었다.

 

* 민족혁명당의 선전위원인 해공은 민족전선에서 중국 전역에 항일단체를

조직, 지도하는 임무를 맡다.

 

12월초 (상해가 함락되고 남경도 위태로워지자 중국 정부는 중경으로의 천도를 발표하 고, 일단 한구로 옮기다.)

이에 해공은 부인 및 정성한 딸(정완21세) 아들(하균 19세)등 식구들과 함께

한구를 목적지로 하여 남경을 출발했다.

그러나 해공은 중국정부를 따라가지 아니하고 독자적인 경로를 택하였다.

그의 이동 경로는 남경으로부터 북상하여 일본군이 지나간 후방지역인 서주를 거쳐 낙양까지 갔다가 다시 전지를 뚫고 남하하여 한구로 가는 경로였다.

해공이 이같은 위험천만한 장거리 우회로를 택한것은 이동 과정에서 한인 동포들을 위무하고 항일 무장투쟁에 나설 수 있는 한인 청년들을 찿으려는데 있었다.

 

(작성자 주 : 중국정부가 남경으로부터 철수한 이후에도 해공이 중국정부의 일원 으로 남아있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그 후 해공의 행보로 보면 중국정부가 남경을 떠날 때 해공은 심계원 감찰위원직을 사임한 것 같으나 이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나 증언을 찿을 수 없다.)

 

12.13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하다.

이후 2개월 동안 남경시민을 상대로 학살과 만행을 저질렀다.)

 

1938. 4.
조선청년전위연맹(청년전위) 결성

한구에 당도한 해공은 당을 주도하는 김원봉과의 불화를 피하고자 민족혁명 당을 탈당하다.

해공은 탈당자 10명과 해공이 적진 후방 우회로를 이동하면서 접촉한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남양분교 한인 특설반 출신 및 최창익이 이끄는 조선청년

전시복무단 단원등 80여 명을 규합하여 조선청년전위동맹(청년전위)을 결성하다.

 

10.10. 조선의용대 창설되다.

민족전선을 대표하는 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은 일군에 포위된 임시수도 한구에서

중국정부의 승인아래 국민군과 합작으로 일군에 대항할 한인 무장투쟁

부대로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다.

해공이 결성한 청년전위로 창설에 참여하였다.

당시 의용대의 총병력은 약 200명이었고, 김원봉이 총대장을 맡았으며 2개

구대로 편성하였다. 중국 정부는 조선의용대를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대에

소속시키고 대원들을 중국의 6군 13개 성의 군지에 분산 배치하여 무장 선전원

으로서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의용대대원의 선전 임무는 선전물 살포, 일본군 포로 심문, 암호해독 및 일본문 건 번역, 적진탐지,주민선무, 군중동원등 다양한 비전투적인 임무였다.

조선의용대는 한구가 함락(10.26)되기 전 제1차적으로 한구방어전에 투입되었 는데 항일표어를 시내 건물에 도포하는 등 선전 활동을 열렬히 전개하여 중국 인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 해공은 북경지성대학 재학생인 딸 정완을 청년전위에 소속한 의용대 대원인

김재호와 결혼시키고 딸 역시 의용대에 입대하도록 하였다.

김재호-신정완부부는 결혼 직후 중국국민군 2군 염석산 사령관 휘하인 산서성

호노촌에 있는 전구에 배치되어 무장 선전원으로서 참전하였다.

 

12. (장개석이 전쟁지휘총사령부를 중경으로 옮김으로써 중경이 수도가 되었다.)

 

이즈음 해공의 부인과 아들 하균은 중경에 정착하였고 하균은 국민군의 복무원 (문관,소교)으로 복무하였다.

 

1939. 해공은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이래 지도위원을 자임하여 2년동안 전국의 의용대

지대를 순방하며, 한곳에서 며칠 또는 몇 개월씩 머물면서 대원들과 함께 적전 적후에서 선무, 선전 활동을 하였다.

양자강을 7번 넘나들며 귀주, 운남에서 또한 황하를 7번 넘나들며 안휘, 하남, 하북등의 의용대 지대들의 대원들과 더불어 “돌처럼 굳은 곰팡이 핀 누룽지를 삶아 하루 한끼로 식사를 대신에 하며 대원들과 함께 노숙하였고 때로는 들판 의 미구를 잡아 굶주린 대원들을 먹였다.” “왕부장의 뒤를 따르면 탱크를 앞세 운것 같이 든든하였고, 그는 우리 대원들을 아버지처럼 돌보았다.”

 

8. 7당 통일회의

좌우합작전선인 이른바 7당통일회의에 청년전위를 대표하여 주석단의 일원으로

참석하다. 임정청사가 있는 기강(사천성)에서 개최된 7당 통일회의는 중국 정부 의 종용에 따라 광복연합(김구)과 민족전선(김원봉) 두 단체 대표가 공동명의로 5월에 발표한 성명에 의해 소집된 것이다.

광복연합에 소속한 한국국민당(김구), 조선혁명당(최동오), 재건 한국독립당(조소앙)등 3당과 민족전선에 소속한 청년전위(신익희), 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 조선혁명자연맹(유림)등 4개단체등 도합 7개 단체를

하나의 민족통일전선으로 묶는 데 목적이 있었다.

통일전선 형성에는 찬동하였으나, 조직의 방식을 두고서는 의견이 두갈래로

대립하였다.

김구와 김원봉은 단일의 당으로 구성하자고 주장한 반면 신익희와 김성숙은

과도적인 연맹방식을 주장하여 7당 회의는 결렬되었다.

 

해공은 7당회의가 결렬된 후 의용대원들이 다수 모여있는 하남성으로 가 전선 에 복귀하였다.

 

1940. 4. (임시정부가 기강으로부터 중경으로 청사를 옮기다.)

 

5.9 한국독립당 창당

한국국민당(김구), 재건 한국독립당(조소앙), 조선혁명당(지청천)은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김구)을 창당하다.

 

5.17. 한국광복군 창설

임정의 김구주석 주도로 한국광복군을 중국 정부의 승인하에 창설하다.

모집한 청년 80여명으로 출발하였다.

사령관에는 지청천 장군, 창모장으로는 이범석 장군을 초빙하였다.

광복군은 4개 지대로 편성되었다.

병력은 창설 1년만에 300여명으로 늘어났다.

 

11. 4 조선의용대 북상 결정

조선의용대는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화북에는 병력을 충원할 수 있는 한인들이 많고 또한 한반도와 가까움으로 화북으로 이동하여 한반도로 진군할 태세를 갖 추자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어 북상을 결정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의용대원은 국민군과 일본군의 눈을 피해 임지를 떠나 화북이 가까운 낙양으로 모였다가 화 북의 태행산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내리다.

김원봉 총대장은 본부와 대원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중경에 머물기로 하였다.

 

1941. 3. 하남지역에서 대원들과 함께 무장 선전활동을 벌이고 있던 해공은 낙양으로 집결 하는 의용대원들의 북상 움직임에 의문을 품고 그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중경으 로 갔다.

중경에서 해공은 의용대의 북상은 애국적 동기에서 출발하였으나 이것을 이용하 려는 중국공산당과 한인 공산주의자의 음모가 있음을 감지하였다.

작년 여름 민족전선을 이탈한 공산주의자인 한빈이 연안에 있는 중국공산당의 요인인 주운룡과 내통하여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하였고 북상하는 의용대 대원들을 여기에 끌어들이고자 상해에 있는 공산주의자로서 신망이 높은 김두봉 을 화북으로 모셔갔다는 등의 사실을 알았다. 해공은 산서성 국민군 2군에서 의 용대원으로 복무중인 사위(김재호)와 딸(정완)에게 북상에 동참하지 말 것을 경고 하였다.

 

5. 김재호-신정완부부는 아버지의 예측대로 북상 강요에 당면하였다. 이들 부부는 다른 대원8명과 함께 이에 저항, 심한 폭행과 연금을 당했으나 정완의 기지로

중경에 있는 아버지에게 연락하여 구출되었다. 부부는 저항했던 다른 대원들과 함께 서안에 있는 광복군을 찾아가 김재원은 참령(소령)으로 신정완은 정위(대위) 로 복무하였다.

 

7. 7 태행산에 집결한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화북지대를 결성하였다.

김두봉이 이들을 지도하였으며 박효삼이 지대장을 맡았다.

 

12. 8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다.

임정은 일본, 독일, 이태리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다.)

 

1942.
중경에서 해공은 외롱둔 처지였다.

애써결성했던 민족혁명당은 김두봉이 차지하였고, 자신을 따르던 청년전위 대원 들은 대부분이 화북으로 넘어가버렸다.

임정초기와는 달리 임정안에서도 설 자리가 없었다.

 

한중문화협회 가입

해공은 민간단체인 한중문화협회(회장 孫科,손문의 아들)에 가입, 한중 지인들과

접촉하면서 정보를 얻고 또한 그들을 설득하는 외교활동에 치중하였다.

해공은 중국정부의 유력자 진립부에게 장개석 주석이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 군사위원 강택에게는 북상한 조선의용대는 중국공산당의 당군에 편입되고 말 것이라 예견하면서 중경에 남아있는 김원봉을 적극 포섭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당시 중국의 국공합작은 국민당 정부의 반공정책으로 사실상 와해되어 있었다.

 

*김구에게도 국권회복의 기회가 눈앞에 다가온 차체에 독립운동계가 뭉쳐있지

않으면 열강이 우리의 독립역량을 의심할 것이니 사상과 감정을 초월키로 한

대당 정신에 입각하여 김원봉과 연대 할 것을 설득하였다.

아들 하균이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5.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다.

중국정부의 조치였다. 광복군에 부사령관을 신설하여 김원봉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의용대를 광복군 제1지대로 하고, 기존의 광복군 4개 지대는 하나로 묶어

광복군 제2지대로 개편하였다.

김원봉은 제1지대장을 겸하고, 이범석 참모장은 제2지대장을 겸했다.


화북의 김두봉은 화북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 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의용군은 이듬해 말 연안으로 이동하여 팔로군에 편입되면서 무정이

조선의용군의 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이들은 해방 후 북한으로 들어가 연안파를 형성하였다.

 

8. 4. 해공은 임정의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이 되다. 조소앙이 위원장이었다.

 

10.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모든 정파의 임정 참여가 구체화되고 민족혁명당 의 김원봉, 조선혁명자연맹의 유림등과 청년전위의 김재호-신정완 부부도

나란히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3. 3. 4.
해공이 임정의 외무차장에 임명되다.

이로써 임정 안에서의 그의 활동이 20년 만에 재개되었다.

 

1944. 5. 8.
내무부장에 취임하다.

4월에 개최된 제36회 임시의정원에서 통과한 제5차 헌법개정에 의하여 성립된 통합연립내각에서 내무부장으로 입각하였다.

이번 임정 조직은 당시 중경에 있던 모든 정당과 정파를 망라한 명실상부한

통합정부로서 대당 정신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해공은 한국청년단을 대표하여 입각하였다. 이것으로 볼 때 해공은 중경에서

소수의 청년들로 한국청년당을 조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6. 내무부 산하에 임정을 경호할 경위대를 설치하다.

일군에서 탈영한 한국 학도병을 경비대에 우선적으로 채용하였다.

 

1945. 8.
8.15해방을 맞이하여 내무부는 귀국을 희망하는 재중경 동포들과 임정요인들의 귀국업무를 책임지고 이를 주관하였다. 해공은 상해의 주중 미군당국과 교섭하 여 임정요인들을 위한 귀국 항공편을 마련하고, 중국 정부로부터는 상해까지의 항공편과 선박 편의를 약속받았다.

 

11. 환국을 앞두고 개최된 임시의정원과 정부 각료 연석회의에서 국내에서 수행해야 할 일들에 대한 논의에서 해공은 다음의 6가지 사항을 제지했다.

 

1) 임정 요인들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해서 우월감을 갖지 말 것.

2) 국내 각계각층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

3)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와 진정으로 일본에 충성한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일본에 협조했던 사람들도 건국대열에 동참하도록 할 것.

4) 환국 이후 모든 일에 앞서 독립운동으로 순국한 선열에 대한 범국민적인

위령제를 개최할 것.

5) 귀국하면 정당과 정파를 내세우지도, 만들지도 말 것.

6) 그 대신 임정의 주도로 건국을 뒷받침할 국민조직을 전국 방방곡곡에

조속히 결성할 것 등 이었다.

 

11.23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정 요인 15명이 제1진으로 귀국하다.

 

12.01 해공은 제2진으로 요인 14명, 수행원5명, 합계 19명과 함께 군산 옥구 공항에

내려 조국 땅에 입 맞추며 눈물을 쏟다. 이튼날 서울에 도착하였다.

 

12.02 임정산하에 정치공작대의 결성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3주후엔 전국의 면단위까지

지부를 두다.

한편으로 지식인과 일제하의 소장 관료 출신들을 중심으로 행정연구반을 조직하 다.

 

12.25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5년간의 신탁통치를 결의하고 한국에 임시

과도정부를 수립할 기구로서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다.)

 

12.26 (이승만 박사가 라디오방송을 통해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천명하다.)

 

12.28 (김구주석은 긴급국무회의를 소집. 신탁통치 반대를 의결하다.

공산당을 포함 한 모든 정당 및 시민단체들이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발족시키다.)

해공은 9인 지도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다.

 

12.31 총동위는 종로에서 첫 반탁 민중시위를 대대적으로 전개하다.

 

같은 날 해공은 임정 내무부장 이름으로 국자1호, 국자2호라는 포고문을 발표.

군정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은 임정의 지시에 따라 반탁운동에 참여할 것 과 즉시 파업에 돌입할 것을 명령하다.

직원들은 이에 호응하여 경찰서장들까지 파업을 단행하다.



환국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국민대학을 설립하다

1946. 1. 1 미군정은 해공의 포고령을 미군정의 통치권에 도전한 쿠데타로 규정하고 해공을

체포하다. 김구와 하지의 긴급회동에서 해공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반을 해체키로 하는 타협이 이루어져, 해공은 방면되었으나 이에 대해 해공은 김구에게 위소대실(爲小大失)이라고 개탄하였다.

 

(며칠 후 좌익정당들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태도를 표변하여 찬탁시위를 벌렸고

이로 인해 좌우익 간에 충돌도 빈발하였다.)

 

3. (작년말까지 인민위원회 조직을 끝낸 북한에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까지를 단행하다. 조선인 장정을 징집하여 수십만 규모의 군대창설에 박차를

가하다.)

 

5. (그동안 공전을 거듭하던 미소공동위원회는 무기한 휴회를 선언하고 소련 대표

들은 평양으로 돌아가다.)

 

6. 3 (이승만 박사가 정읍에서 남한 단정(單政)의 불가피성을 말하다.)

 

(미군정은 이박사의 정읍발언에 대해 미군정과는 상의도 없는 이박사의 독단이라 고 규탄하였고, 김구 주석도 이 박사의 단정론은 남북분단을 영구히 하자는 것

이라고 반대하였다.)


해공은 현 상황에서 남북통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허깨비상 이라고 주장하고, 이박사의 단정론을 지지하다.

 

1946. 6.19 자유신문사 사장에 취임하다.

 

8. 반탁진영의 총집결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부위원장(위원장 이승만)으로

추대되다.

 

10.16 국민대학을 개교하고 초대학장에 취임하다.

 

10.17 대한체육회 회장에 취임하다.

 

10. 입법의원 민선의원으로 서울에서 당선하다.

(하지 사령관은 그동안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존치돼온 남조선과도 민주의원

(의장 이승만)을 입법의원으로 개편, 입법의원의 의원 절반은 자신이 임명하고

나머지 절반만 민선토록 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이 미국무성과 유엔을 직접 설득할 것이라며 방미의사를 밝히다.

하지는 그의 방미를 방해하였으나 일본에 있는 맥아더 장군의 도움으로 12월

방미를 실현하였다.)

 

1947. 1.20 개원한 입법의원은 좌우합작을 추진해온 하지의 의도대로 좌우합작파인 김규식(金規植)을 의장으로 선출하였으나 뒤이은 회의에서 해공이 반탁결의안을 긴급발의, 이를 가결시키다. 입법의원이 자신을 도와주리라 믿었던 하지의 기대 는 초장부터 빗나갔고 한국민의 반탁의지를 재확인시켰다. 입법의원은 이결의 안을 미 국무성에 유엔에 보냈다.

 

4.22 (이박사가 방미 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귀국하다.)

 

9. (미국정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다.)

 

11.14 (유엔총회가 한국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하다. 그 내용은 한국문제를 담당할 유엔 한국위원회(유엔한위)의 감시하에 조속한 시일 내에 남북한에 총선을 실시하여

정식정부를 수립한다는 등이었다.)



국회의장으로 활동하다

1948. 1. (소련이 유엔한위의 북한 입국을 거부하다. 이에 따라 유엔은 선거실시가 가능한 남한에서 만이라도 총선을 실시할 것인지를 묻는 소총회를 열기로 의결하다.)

 

2.22 26일에 있을 유엔소총의 표결을 앞두고 해공은 입법의원에서 가능지역에서 총선 실시를 요구하는 긴급동의안을 상정, 김규식의장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과 시켜, 이를 유엔에 전달하였다.

 

2.23 김규식이 의장직을 사퇴, 입법의원은 그를 대신하여 해공을 의장으로 선출하다.

 

3.22 입법의원에서 건국에 필요한 국회의원 선거법을 제정, 공포하다.

 

4.19 (김구,김규식,김원봉 등은 남한만의 총선을 거부,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출발 하다.)

 

5.10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고, 해공은 경기도 광주군에서 무투표로 당선되다.

 

5.31 제헌국회는 국회의장에 이승만을 부의장에 해공을 선출하다.

 

6. 1 해공은 법규기초위원 선출을 위한 10인 전형위원에 선임되어 헌법 및 정부조직 법등 건국 입법에 착수하다.

 

6. 4 헌법초안이 왼성되다.

 

7.17 이승만국회의장에 의해 헌법이 공포되다.

 

7.20 국회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그를 대신한 국회의장으로 해공을 선출하 다.

 

8.15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다.

이로써 1919.4.11. 임시정부 수립으로 태동한 대한민국의 건국이 완성되다.)

 

11.14 지청천, 배은희등과 대한국민당을 결성하다.

 

1950. 2.23 대한국민당과 한국민주당의 합당으로 민주국민당(民國黨)을 결성하다.

지청천, 백남훈, 김성수와 더불어 4인 최고위원으로 선출되고, 해공이 위원장

으로 취임하다.

 

3.18 국회방미사절단으로 워싱턴을 방문, 미하원에서 삭감한 대한 원조액 6,000만불을

회복시키고, 유엔을 방문, 덜레스 주유엔대사등을 만나 북괴의 남침 가능성을

강조하다.

 

5.30 제2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다.

 

6. 2 국회의장으로 선출되다.

 

6.25 6.25전쟁이 발발하다.

 

1951. 5. 1 자유중국 감찰위원장 우우임(于右任) 초청으로 대만을 방문하다.

 

1952. 6.30 임시수도 부산에서 국회의장으로 선출되다.

(초대와 2대 전,후기를 합쳐 연속3회 6년동안 국회의장을 역임한 기록을 세우다.)

 

7. 4 (국회에서 대통령직선제를 규정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다.)

 

8. 5 (제2대 정, 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다.)

 

1953. 5.18 국회의장으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 참석 및 참전우방16개국을 방문하기

위해 출국하다. (4개월만인 9.19일 귀국하다.)

 

7.27 (휴전협정이 체결되다.)

 

10. 뉴델리 밀회설이 유포되다. 해공이 16개국 순방 도중 비밀리에 뉴델리에서

납북된 조소앙을 만나 한국에 제3세력을 형성키로 했다는 유해한 소문이 크게

보도되고 당내에서도 진상규명을 위한 비상 회의가 개최되었다.

해공은 무대응으로 일관하였고, 모략임이 밝혀졌다.



민주당 창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다

1954. 5.20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당선하다.

 

8. 의장 공관처럼 사용하던 삼청동 집을 국가에 헌납하여 신임 이기붕 국회의장이 공관으로 사용토록 하고, 자신은 효자동에 집을 얻어 이사하다.(삼청동집은 군정 시 앤더슨 경기도지사 고문이 사용하던 적산가옥이었는데 그가 귀국하면서 입법 의원 의장인 해공에게 불하권을 인계한 집이었다. 효자동 옛집은 해공이 서거 때 까지 기거했던 곳이다. 이집을 2003년 해공기념사업회와 서울시, 보훈처의 3자 합자로 매입한 이래 문화재로 지정받아 해공신익희선생 임시기념관으로 사용되 고 있다.)

 

1954.11.29 대통령 중임제를 철폐하는 사사오입(四四五入)개헌 파동이 일어나다.

 

11.30 해공을 비롯한 야당계의원 60여명이 호헌동지회를 결성하고 헌정을 유린한 세력 과 맞서 싸울 신당 발기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의하다.

 

1955. 9.18 민주당을 창당하다.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다.

 

1956. 3.28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다.

 

1956. 4.11 수송국민학교에서 가진 첫 정견발표회에 2만여 청중이 운집하다.

 

4.26 야당 정·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한 조봉암 진보당 대통령후보와의 협상이 결렬 되다.

 

5. 3 한강백사장(漢江白沙場) 유세를 가지다. 40만 인파가 쇄도하다.

 

 

5. 5 새벽, 호남지방 유세차 내려가던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急逝)하다.

(향년 63세)

오후 6시경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하여 효자동 자택으로 향하던 중 통분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경무대 진입을 시도, 경찰의 발포로 3명의 사망자와 2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700여명이 검거되다. 피검 후 석방된 사람들이 5.5동지회를

결성하였다.

 

1956. 5.23 국민장이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다. 수유리 산74-3 산록에 안장하다.

.

이후 현재~

1

1957. 5. 5 건설업을 하는 최사만 사장이 묘소 진입로 곁에 묘막(墓幕, 묘소관리실)을 건립 하여 기념회에 기증하다.

 

1961. 5. 1 국민대학교 동창회가 (신창현 편저 해공 신익희 선생연설집) 증보판을 출간하다.

 

6. 윤보선대통령의 주선으로 묘소에 비석,상석,망주등 석물을 완수하다.

 

1962. 3.10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다.

 

5. 5 5.5동지회에서 신창현 편, 해공신익희선생 약전(略傳)을 간행하다.

 

1966. 5. 5 이효상 국회의장 주관으로 10주기 추모식을 3.1당에서 거행하다.

그 직후 나용균의원의 주동으로 국회의원68명이 발기인이 되어 (해공신익희선생 기념회(이하 기념회)를 설립, 초대회장에 최두선 전국무총리, 부회장에 나용균 의원을 추대하고, 추도식은 5년에 한번씩 국회가 주관하되 나머지 기간은 매년 기념회가 주관키로 결정하였다. 발기인들은 기념회가 주관하는 추모행사비용으 로 100만원을 기념회에 적립하였다.

 

1967. 신창현 저 해공신익희선생 약전을 5.5동지회에서 간행하다.

 

1971. 5. 5 조시원 광복회 회장 주관으로 15주기 추모식을 수운회관에서 거행하다.

 

1972. 2. 이희성 전 서울대 문리대학장(국문학자)을 기념회 2대회장으로 선임하다.

 

1972. 5. 태극출판사에서 신창현 저 해공신익희를 위대한 한국인 전집중 제12권으로 출판 하다.

 

1976. 5. 5 정일권 국회의장 주관으로 20주기 추모식을 수유리 묘소에서 거행하다.

 

1980. 6. 유진산 전 신민당 총재를 기념회 3대회장으로 선임하다.

 

 

1981. 5. 5 정래혁 국회의장 주관으로 25주기 추모식을 신문로2가 현대인력개발원(구 서울 고등학교 강당)에서 거행하다.

 

5.15 신정완(외동딸)저, 해공 그리고 아버지를 도서출판 성진사에서 간행하다.

 

1983. 7.11 탄생90주년에 즈음하여 해공신익희선생동상을 국민대학교 동창회가 국민대학교 교정에 건립하다.

 

1984.12.12. 유치송 저, 해공신익희선생 일대기-민주한국의 대도를 간행하다.

 

1986. 5. 5 이재형 국회의장 주관으로 30주기 추모식을 국민대학교 강당에서 거행하다.

 

1987. 5. 5 해공신익희선생 추모비를 남한산성 입구에 건립하다.

추모비건립위원회(회장 김해진,위원 이춘석외)

 

1988. 8.16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160-1,(해공선생 생가)를 경기도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하다.

 

1989.11.25. 신창현 저, 내가모신 해공신익희선생을 간행하다.

 

1990. 6. 유치송 전 민한당 총재를 기념회 4대회장으로 선임하다.

 

1992. 5. 5 신창현 저 해공 신익희를 간행하다

 

1991. 5. 5 박준규 국회의장 주관으로 35주기 추모식을 국회의원회관에서 거행하다.

 

1993. 4 국민대학교에 해공기념관을 개설하다.

 

5. 3 해공의사상과 교육철학 학술세미나를 국민대학교 주관으로 국민대학교 소강당에 서 개최하다.

 

1996. 4.10 해공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를 사단법인으로 국가보훈처 제5호로 등록하다.

5. 5 황락주 국회의장 주관으로 40주기 추모식을 국회의원회관에서 거행하다.

 

5.10 사단법인 해공장학회를 설립하다.

 

5.20 기념회 주관으로 해공신익희선생 유품전과 휘호전을 일민회관에서 일주일간

개최하다.

 

2000. 5.10 국회의사당 노텐드홀에 해공신익희 의장상(銅像)을 설치하다.

 

7.11 남한산성광장에 해공신익희선생 동상을 경기도 광주시 주관으로 건립하다.

또한 광주시 초월면 서하리에서 남한산성에 이르는 도로를 해공로로 명명하다.

 

2001. 봄 서울 강동구 천호동 448-49 마을마다에 해공신익희선생동상을 강동구청 주관으 로 건립하다.

 

5. 5 이만섭 국회의장 주관으로 45주기 추모식을 국회 헌정회관에서 거행하다.

 

2002. 5. 5 해공문화상을 서울시 강동구청이 제정, 시상하다.

 

2002.12. 해공신익희 선생의 생가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서하리)가 소실되다.

 

2003.10. 해공선생이 서거 당시에 사시던 서울 종로구 효자동164-2 (고택) (대지73평,건평 35평 한옥)을 기념회의 모금, 국가보훈처 및 종로구청의 보조금으로 매입하다.

10. 수유리 묘소의 묘막(강북구 수유리 산74-3)이 전기 누전으로 소실되다.

강북구청등의 지원과 보조로 복원을 추진을 하고 있다.

 

2004. 여름 경기도 및 광주시가 2002년에 소실된 선생의 생가를 복원, 준공하다.

 

2004. 6. 해공신익희생 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해 기념회의 모금 및 국가보훈처, 서울특별시 의 보조금으로 고택과 인접한 효자동 164-15, 효자동168번지의 주택을 매입 하다.

 

2005. 2.11 효자동 선생의 고택을 서울특별시의 지정문화재(제23호)로 지정하다.

 

2006. 5. 5 김원기 국회의장 주관으로 50주기 추모식을 국회 헌정회관에서 거행하다.

 

5.12 '정치인 해공의 삶과 인품' 학술세미나를 기념회 주관으로 국민대학교 소강당에서 개최하였다.

 

8. 유기정 전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을 <기념회> 5대 회장으로 선임하다.

 

2007, 3. 서울시의 예산지원과 종로구청의 시행으로 효자동 고택을 중수하기 시작하였다.

 

12. 전국경제인 연합회에서 고택 수리비의 일부로 5천만 원을 기부하였다.

 

12. 기념회가 3인이 공동 집필한 <해공 신익희 연구> (400p)를 출간하였다.

(연대 오영선 교수: 출생에서 망명까지/ 성신대 이현희 교수: 독립운동에서 환국까지/ 부산 동의대 정경환 교수: 광복 후 정치 활동에서 서거까지)

 

2009, 5,11. <社團法人 海公申翼熙先生紀念事會> 표장을 등록하였다.

(특허등록 제42-0002377호)

 

9. 고택의 중수를 완료하였다.

 

2010, 3.25 남덕우 전 국무총리를 <기념회> 6대 회장으로 선임하다.

 

5. 4 기념회 주관으로 '해공 선생의 사상연구' 학술세미나를 국민대학교 소강당에서

개최하였다.

 

2011, 5. 5 박희태 국회의장 주관으로 55주기 추모식을 헌정회관에서 거행하였다.

 

6. 3인 공저, '해공 신익희 연구' 재판 발간

 

10.21 기념회 주관으로 '해공 선생 독립운동과 애국애족 사상 및 민주화 정신' 학술세

미나를 프레스센터 19층에서 개최하였다.

 

2012, 7.11 해공 선생 탄생 118주년을 기념하여 '광복 이후 선생의정치 활동에 관한 학술

세미나'를 프레스센터 19층에서 개최하였다.

 

10.19 해공 선생의 묘소가 국가 문화재 제520호로 등록되다.

(소재: 강북구 수유리 산74-3호)

 

2013, 6,25 이용곤 <기념회> 상근부회장을 회장 대행에 보임하였다.

 

2014, 3.25 박관용 전 국회의장을 기념회 7대 회장으로 선임하였다.

 

2015, 2,24 국회도서관 주관으로 '해공 선생 유품 전시회'를 국회도서관에서 개최하였다.

 

2016, 5. 5 정의화 국회의장 주관으로 60주기 추모식을 국회 헌정회관에서 거행하였다.

2018,11.11 현승일 (전)국민대학교 총장을 기념회 8대 회장으로 선임하다.

2019, 5. 5 ‘3. 1운동 및 대한한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을 기념회 주관으로 63주

기 추모식과 함께 수유리 묘소에서 거행하였다.

 

10. <임시 해공 기념전시실>을 고택에 설치하였다.

 

2019.11. 기념회 광주지부(廣州支部)를 광주시에 개설하였다. (지부장 김종영)

 

2020, 4.22 해공 유족회 (증손녀 사위 지춘호 등 유족 5인)가 기념회에 1,000만 원을

기부하였다.

 

11. <기념회>가 <해공 신익희 선생 묵자 집(海公申翼熙先生墨子集)>을 발간하였다.

 

2021, 4. 해공의 종손 창현의 차자로서 해공 가문의 어른이신 학영 선생이 100년 이상

보관 해오던 해공의 (일분몽구1,440자) 원본을 기념회에 기증하였다.

기념회에서는 이를 영인하여 견본을 만든 후 원본을 기증자의 소유로 반납하다.

 

2021, 5. 5. 해공 신익희 선생 65주기 추모식을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수유리 묘소에서 거행

하였다.

(관례대로라면 그해의 추모식은 국회의장 (박병석)이 주관할 차례였으나 국회의

무위로 부득이 기념회가 주관하였다.)

 

추모식전에서 김일윤 현정회 회장이 해공 신생의 국회 발언 속기록을 제책

(해공 신익희선생 의정기록 전4권)하여 영전에 봉정하였다.

 

2021,10. 일분몽구 영인본 110부를 간행하였다.

 

11. 일분몽구 간행에 대비하여 이 책의 해제 및 역주를 임동석 건국대 교수에게

위촉하다.

 

2022, 3.11 지춘호 경풍약품 회장이 일분몽구 간행비로 3,000만원을 기부하였다.

 

4. 6 평산신씨(완구공파) 문중에서 1,000만원을 후원하였다.

 

4,26 지춘호 회장이 5억 원을 기부하였다.

 

2022, 8.15 일분몽구를 발행하였다. (일조각),

8월 31일 국민대학교에서 출판기념회를 하였다.

 

11,26 김충환 전 국회의원을 기념회 9대 회장으로 선임하다.

 

2023. 6. 1 경기 광주지부장 안태준 임명

 

7. 1 중국 거주 해공 손자며느리 (신하균의 아들 王建明 처), 증손자, 고손자 6명

기념사업회 및 국민대학교 방문.

 

2024. 1.16 경기도 광주지부 설치 정관 변경 보훈부 승인

 

2024. 4. 5 해공정신 발간 편집 회의 개최

 

2024. 5. 5 해공 신익희 선생 68주기 추모식을 수유리 묘소에서 거행하였다.

“해공정신” 창간호 발행

(편집위원 : 현승일,김충환,유일호,신동호,이창수,이창봉,정해훈 7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