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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신익희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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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지문

    해공 신익희선생(고택 문화재) 기념관 건립

    우리 옛 글에 온고지신이란 말은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다시 말하자면 지나간 좋은 일이나 훌륭한 사람들의 좋은 점을 거울삼아 오늘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본받고 실천하라는 말이라 할 것입니다.

    해공 신익희 선생은 1894년 7월 11일(음력6월9일)에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서하리에서 출생하여 1910년 한성 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하였고,

    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에 입학 후 “학우회”를 조직하여 학지광을 발간하며, 조국 광복을 고취하면서 윤홍섭, 장덕수 등과 단지로서 조국 독립운동에 주력 할 것을 맹서하고 조직을 확대하였으며,

    1916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보성 법률 상업학교(고려대전신)에비교헌법,국제공법,재정학을 강의하면서 조국독립을 역설하다가,

    1918년 최린, 임규, 윤홍섭, 최남선, 정노식 등과 독립선언문을 발표 할 것과 해외 독립운동 단체와 동시에 궐기 할 것을 모의하고 예수교 대표 이승훈과 천도교 대표 손병희선생과 상의하고 3.1독립선언문을 발표할 것을 승낙 받고 동시에 협조를 받아 3.1독립선언문을 중국 등 해외 독립운동 단체를 순방하고 3.1운동 시에 선언문을 배포 할 것을 설득하고 올 것을 지시 받고 중국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를 방문하여 설득했으며, 이시영, 홍범도, 문창범, 김좌진, 조소앙 등을 만나 거사를 모의하고 결의하여 2월 말 귀국하여 3.1운동의 거사를 선두에서 지휘하다일본 경찰의 지명 체포령이 내리므로,

    3월19일 일본 경찰을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4월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석하여 제1회 의정원 회의에서 의원에 피선되고 신익희, 이시영, 조소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헌장 기초위원으로 위촉받고, 임시정부 내무차관, 내무총장서리에 임명되고 임시의정원 법제분과 위원장,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피선되고, 국무원 제1호 지방조직제인 연통제를 공포했습니다.
     
    1920년 임시정부 내무총장서리 겸 외무총장서리 국무원비서실장에 임명되고

    1921년 법무총장,문교부장,외교부장,위정원부의장등을 역임하고 1927년 중국 정부요청으로 국민군중장에 위촉받고 남경정부심계원 고문으로 위촉하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임시정부 재정에 도움을 주고 한중합작전선을 도모하였습니다.

    1933년 김규식, 김원봉등과 같이 대일전선 통일동맹을 결성하여 대일 항전을 전개 함.

    1937년 김인철과 조선민족투쟁동맹을 결정하여 중국 각지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 지도함.

    1944년 좌우합작 연립내각을 수립함과 동시에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다시 취임하여 대일 항전에 박차를 가함.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패망으로 조국의 광복을 맞아 임시정부 요원의 귀국절차를 중국정부와 주중미군 당국과 교섭대표로 위촉받아 교섭에 성공(대한민국임시정부는 참전국으로 인정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유엔군 측은 임시정부자격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모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라 했음)하여 제1진은 10월에 귀국하고 제2진은 11월1일에 임시정부 내무부장으로 요원들과 같이 전북 군산공항에 내리자 조국 땅에 입 맞추며 회환의 눈물을 흘리었다.

    1946년 대한민국 건국 후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하여 국민대학교를 창건하고 행정 연구반을 구성하여 건국 후 시행 할 행정 자료를 수집케 하였으며 제8대 대한 체육회 회장에 추대되었고, 12월에는 조선과도입법위원에 당선되었다. 1947년 입법위원회 의장에 피선되어 대한민국 헌법과 건국에 필요한 법률을 기초하고 제정하는데 주력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경기도 광주에서 무투표로 당선되고 5월30일 제헌국회 부의장에 피선되고 8월4일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므로 65일 만에 국회의장으로 피선되어(제헌국회1,2기)2대국회(1,2기)연4회 국회의장을 역임하면서 명사회자로서 의회제도 확립에 획기적인 공적을 남기시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시에는 가진 탄압을 받고 당선되었으나, 소위 사사오입 해괴한 수리로 개헌을 선포하자 이 개헌파동에 충격을 받아 호헌동지회를 결성하고

    1955년9월18일 호헌동지회원과 재야 정치인 연합으로 민주당을 창당하여 대표 최고위원에 피선되었다.

    1956년3월18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유명한 ‘한강백사장에서 50만 명의 청중(당시 서울시민이 1,500,000명으로 시민1/3이 참가한 것임.)에 국민에 보내는 유명한 연설을 남기시었고, 당시 국민 여론은 절대 다수의 지지를 받고 당선이 결정적인 때 호남지역 유세를 우이하여 5월4일 밤열차로 전주로 가든 중 함열역을 지나면서 기침하시었으나 하늘도 무심하게 5월5일 아침에 향년63세로 서거하시니 대다수의 국민이 대성통곡하고 탄식하였으며, 당일 영구가 서울역에 도착하여 효자동 164-2호 자택으로 운구하는 과정에 수십만 군중이 길거리에서 애도했으며, 경무대(현 청와대) 앞에 이르자 수만 관중이 선생의 사인규명을 외치며 경무대로가 이승만대통령을 면회하여 사인을 규명하자고 하자 군중에 군경의 발포로 2명이 즉사하고,27명이 부상당하고,700여명이 체포되어 50여명이 실형을 받는 등 국민들의 해공선생에 대한 기대와 애국애족 정신에 절대적인 지지와 애정이 충만했으며, 5월23일 국민장으로 수유리 산록에 장례를 모실 때도 길거리는 수십만 군중이 눈물바다를 이루었으며, 숭고한 정신과 의회정치 확립에 크게 공헌한 업적을 받들기 위하여 국회의사당 중앙 홀에 동상을 건립했으며, 국민대학교 교정에 동상 건립, 남한산성 광장에도 동산 건립(광주시와 시민),서울시 강동구 마을마당에 동상건립(강동구청)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에 동상건립(초월면민) 및 초월면 서하리에서 남한산성까지의 길을 “해공길“로 명명(광주시)하는 등 국민들의 많은 분들이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추모하며 지금도 각지에서 5월5일에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추모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해공신익희선생은 이 세상에 출생하여 유년 시대를 제외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교 유학 시절부터 “학지광”을 통하여 조국 통일을 위하여 윤홍섭, 장덕수 등과 단지로 맹세하고 3.1독립선언문 발표를 위하여 국내는 물론 해외로 활동하다가 3.1독립선언문 발표 때는 해외에서 활동하다가 동년2월 말에 귀국하여 3.1운동을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1919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헌장기초와 중요 직책을 역임하면서 한중 연합전선을 통하여 참전국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전력을 기우리다 조국 광복을 맞아 임시정부 요원 안전 귀국을 위하여 교섭대표로서 임시정부 요원들을 안전하게 귀국시키고 2진으로 귀국하게 된 공로와 대한민국 수립에도 입법회의 의장으로 헌법기초와 건국에 필요한 모든 법을 기초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큰 공헌을 했으며, 의회 민주주의 확립에 혁혁한 공을 남기시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 국민의 추앙을 한 몸에 받다가 서거했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국민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선생이 이 세상에 태어나 자기 이름으로 문패를 붙이고 살던 집이 바로 유일하게 효자동 고택이고 다행히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므로 이 가옥을 문화재(사적지)로 2005.2.11. 지정 받았으므로, 그 옆에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후손들에게 애국애족하고 나라 사랑에 헌신하고, 주국을 민주국가로 크게 발전시킨 사람이 살던 집이라고 알리고 누구든 애국애족국가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면 이렇게 그 정신을 영원히 보존하고 선양한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어 기념관을 건립하고자 합니다.



    2019년 5월 5일
    사단법인 해공신익희 선생 기념사업회 회 장 현 승 일